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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했다. 300만명의 관객동원을 하고, 

손예진의 10억 투자에 대한 기사가 한동안 있었다.

개봉일에 대해 여전히 논란꺼리였지만, 흥행을 하고 있다.

본인은 조금이나 사람이 없는 틈을 갖기 위해서 늦게 보고자 했다.

영화 덕혜옹주는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소설 덕혜옹주는 실제인물을 갖고 소설화 한 것이다.

덕혜옹주가 소설책으로 인기를 끌자 같은 인물로 일본에서 먼저 소설을 쓴 일본 작가[혼마 야스코]가

소송할뻔적도 있었다.  (사유는 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각주:1]




그래서... 난 영화가 약간 못마땅하다..( 왜 원작을 권비영으로 했을까...)

나는 덕혜옹주를 안 것은 소설로 나오기 전에 알았다.

아마... 내 기억 상으로는 고등학교인가.. 대학교 초반에 알게 되었다.




뭐...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고종일가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관련 카페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경우였다.

그 후에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운현궁, 종묘를 차례로 관람했다.

더 후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유릉 일원도 다녀왔다. (아직 흥선대원군의 묘는 가보지 못했다.)

영화는 소설 덕혜옹주의 내용을 비교적 잘 따라가지만 감독이 더 많이 각색한 내용도 있다.

두가지 정도를 들자면, 덕혜의 망명같은 경우엔.. 감독이 극적인 부분을 끌어올리기 위한 허구이다.

김장한이 일본 육사로 졸업한 경우로 나오지만, 실존 인물인 김을한은 일본육사를 졸업하지 않았다.

더불어 영친왕을 처음 만나는 것은 해방이후이다.

영화 중반을 지나면서 내 머릿속에는 덕혜의 삶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떠올랐다.[각주:2]


이구 생전 사진


그 이유는 어쩌면.. 김장한이 일본에서 덕혜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갔을때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별관으로

쓰는 건물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카사카 호텔 별관은 원래 영친왕의 저택이었고, 이구가 어릴적에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2005년 이구가 사망한 곳이 이카사가 호텔 신관인데.. 사망한 객실에선 별관이 잘 보인다고 한다.)


FinePix S5Pro아카사카프린스호텔 별관사진

[원출처]:

암튼... 영화 덕혜옹주는 대한제국황실의 여인이 아닌 한 여성의 삶을 그린 영화였다.  어느 댓글에서인가...

덕혜옹주와 대한제국황실이 독립운동에 보태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하지만 고종에 관해서 찾다보면...

이런 저런 야사에서 독립군을 도와준 것이 꽤 많은 것이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친 중에 이재면, 이재극 같은 친일적인 행위를 한 인물도 있다.

하지만, 한가지 곰곰히 생각해야할 것이 있다면... 당시 황족들이  식민지 조선의 민중의 삶보다 유복하게 지냈고,

당시 최고의 학교를 다니면서 생활했지만, 그 마음에는  영화에서 덕혜가 야외에서 한글학교를 세우고,

제철소 연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마음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편치 못했던 마음이 병이 되었을 것이고...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4.5 | 200.0mm | ISO-100



낙선재에서 사망한 덕혜옹주는 그의 아버지와 오빠들이 묻힌... 홍유릉에 잠들어 있다.

현재 덕혜옹주와 영친왕, 의친왕 묘역은 비공개구역이다.

관람하고자 한다면.. 관리사무실에 말하면.. 관리직원과 동행하에 관람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면.. 제례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주이씨대종종약원에서 덕혜옹주에 대한 제례를 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나니.. 다시 홍유릉에 가고 싶어졌다. 안개 낀... 홍유릉이 보고 싶어진다.

영화 외에 내용을 더 알고자 한다면.. 아래의 책들을 추천한다.


제국의 후예들/ 정범준/ 황소자리/2006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김을한/페이퍼로드/2010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해경/진/1997/품절

의친왕 이강/박종윤/하이비전/2009

대한제국황실비사/곤도 시로스케 지음/이연숙 옮김/ 이마고/2007
*대한제국황실비사의 경우 실제로 순종황제 측근에 있었던 이왕직 관리인 곤도 스로스케의 회고록이다.

덕혜옹주/혼마 야스코/ 이훈옮김/역사공간/2008


모든이미지는 다음의 영화검색 "덕혜옹주" 페이지에서 갖고 왔다.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별관의 사진은 구글검색이며, 아래의 원출처 형식으로 링크를 걸었다.

  1. 그 당시 신문기사는 아래와 같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51537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6061300034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54167 [본문으로]
  2. 이구의 삶은 위키백과 사전으로 대신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5%AC_(1931%EB%85%8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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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이어서 "고종과 광무개혁"에 관한 나머지 부분을 올려 드립니다.
앞의 내용을 잘모르시는 분은 "수업발표문>고종과 광무개혁" 포스팅(링크되어있음)을 따라 가시면 됩니다. 
발표문의 각종 각주와 참고문헌은 없앴습니다. 

고종황제즉위식행렬

 

1. 들어가는 말
2. 고종의 개명군주 논쟁
3. 대한제국국제의 성격논쟁
4. 
내장원 중심의 근대사업
5. 대한제국의 성격  
6. 맺음말  


4. 내장원 중심의 근대사업

 

이용익 동상(보성고등학교)

광무개혁 기간 동안 궁내부가 거대한 관부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종은 정부대신을 중심으로 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측근세력을 통해서 국정을 운영하려 했기 때문이다. 갑오개혁 당시 궁내부 대신관방산하에 16개 산하기구가 존재하였지만, 광무개혁기간인 1903년에는 궁내부에는 28개 산하기구와 524명의 인원을 거느린 거대한 관부가 되었다.

광무개혁년간에 궁내부가 식산산흥업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중심기관이 된 것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국가 부강하려면 정부가 나서서 농상공무를 잘 시행해야한다는 분위기였고, 또한 고종의 입장에서도 볼 때 황제권을 근대적으로 보강하기 위해서도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식산흥업정책의 추진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궁내부 산하 내장원은 황실재산인 역둔토, 광산, 홍삼, 잡세 등의 막대한 재원을 관리하면서 개혁자금을 지원하였고, 1899년 이후 각종 식산흥업산업 정책을 추진하는 기구의 중심에 있었다. 이렇게 궁내부가 식산흥업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과단성과 신속성, 추진력이 필요했고, 때로는 열강의 방해를 피해 진행되어야할 사업의 속성상 공식적인 정부기구보다는 황제의 근시기구인 궁내부가 적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식산흥업사업의 중심에는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궁내관들이 있었다.

우선 이용익(1854~1907)은 함북 명천 출신으로서 보부상으로 행상을 하면서 자금을 모아 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하여 거부가 되었다. 그리고 한성에 올라와 민영익의 집에 기거하면서 금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비와 민영익 사이를 오가는 연락담당을 하였다. 그리고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감역에 제수되어 금광을 관리하였다. 금광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광무개혁 당시 내장원경에 발탁되어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용익이 역점을 두고 추진한 정책은 우선 광산경영으로 18981월 철도와 광산에 외국인 합작을 금지한다는 규칙을 제정한 이래 광산경영에 외국자본의 침투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전국 43개 군 광산 모두를 궁내부로 이속시킨 후 광학국을 중심으로 근대적 기계를 도입하고 외국인 기술자를 고빙하여 근대적인 광산경영에 착수하였다.

1900년에는 농상공부 철도국을 폐지하는 대신에 궁내부에 철도원을 신설하여 일반적인 철도업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또한 궁내부 서북철도국을 중심으로 경의·경원철도 부설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자금부족으로 서울에서 개성까지 일부구간을 건설하는데 불과하였지만, 일제의 방해가운데서도 자력을 시도했다는 사실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용익이 역점을 두어 추진한 정책은 근대적 화폐제도의 실시 및 중앙은행 설립문제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제대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화폐제도와 은행설립이 기본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일본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개항으로 일본과 통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이 이미 조선의 화폐주권을 침탈하고 있었고, 18947신식화폐발행장정의 채택에도 불구하고 본위화 주조하지 못한 채 악화인 백동화만 남발하고 있는 현실은 경제전반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다. 당시 전환국장으로 있던 이용익은 1901화폐조례를 반포, 1903324일에 중앙은행조례태환금권조례의 반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본위와 주조와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구하지 못해 결국 제도만 마련하고 실제로 실행은 미루어진 채 러일전쟁을 맞고 말았다.

이러한 식산흥업정책 추진과정에서 경제적 기반 특권 상인층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궁내부에 일정한 세납을 대신해서 궁내부로 부여받은 특권에 의거하여 외래자본에 침투에 대항하고 동시에 산하의 군소상인, 생산자, 주객을 지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대표적인 단체가 황국협회와 상무사(商務社) 등이다. 그러나 광무정권이 추진한 식산흥업정책들은 대부분 실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우선 막대한 재원 마련에 있어 내장원 재원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어 외국차관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열강간의 상호간의 견제와 방해로 실패하였다. 또한 개혁사업에 있어 열강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혁사업을 이끌고자하는 것도 있었다. 특히 일본정부가 광무년간의 식산흥업산업에 대해 면밀하게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한국인 스스로 근대국가 역량을 확보한다면 일제의 한국보호국화 정책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질 것이므로, 일제는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광무개혁 추진을 방해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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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천일은행(위)과 한성은행(아래) 위의 은행은 종로에 있는 우리은행 본점이다. 501번이나 506번타고 가면 지나친다.



이러한 식산흥업정책들에 대해 광무개혁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는 연구자들은 이를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대한제국의 재정정책이 근대적인 재정정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국가재정의 많은 부분이 궁내부 산하 내장원에 집중되었으며(최대 50%), 백동화의 남발은 대한제국의 재정을 악화시키는 주범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근대적인 성과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근시안적인 현상일뿐이며, 1905년 이후 식민지화 과정을 통해서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정점으로 구체제가 해체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재산권 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근대 경제성장이 게시될 제도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지대량의 회복을 언급한다. 18세기 수준으로 지대량이 증대하는 것은 1920년 이후였으며 대체로 동학농민운동기점을 최저점으로 상승하기 시작하여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이 시작되는 1920년대들어서야 회복했다는 것이다. 또한 광무연간에 국왕에게 집중된 예산은 국왕을 중심으로 신흥계층과 함께 거대한 재분배 경제를 형성했으며 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내장원에 집중된 국가재원의 대부분이 인건비와 사치재 구입과 선물 등 희사로 낭비되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매관매직으로 인해 부정부패가 만연함으로서 탁지부에 납부되지 않는 세금으로 인해서 재정이 곤궁해졌다고 주장하였다.

황실산하 산업기관들은 진정한 산업활동이 아니라 유통을 독점하여 군소상인들을 수탈하는 도고회사와 수세회사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광무개혁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내장원의 예산중에서 국가예산을 과다하게 초과한 것은 1904년 한해 뿐이며, 이 또한 1904년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에 맞추어 생각해봐야한다고 주장한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으며, 그 이전에 19038월 고종은 러시아와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고종이 전시에 대비하여 비상금 비축을 고려한 것이고 이 비용은 군비확장과 금융제도 확립에 쓰였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1899년에 출범한 대한천일은행이 백동화 유통지역을 확대해 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켜 경제전망을 밝게함으로서 1903년에 중앙은행 조례를 발표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경제사학자들은 1904년은 예외적으로 내입액이 급증한 것이 아니라 회계책에 기입되지 않았던 주요 수입즉 광산수입, 홍삼전매, 전환국 주조화폐 이래(移來)’1904년에 회계책에 기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또한 황실이 각종 근대사업에 투자를 했음에도 성과가 미비한 것은 그 투자금액이 미비했다고 보고 있다.

매관매직에 대해서도 서로 입장이 매우 다르다. 경제사학자들은 고종이 매관매직에 앞장섰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태진 교수는 이에 대해 반대한다. 그 근거로 우선 명성황후 폐비조칙을 폐기한 것을 들고 있다. 또한 영국인 고문 맥그레비 브라운(Brown,J. M)에게 세관 업무를 총괄하게 했으며 탁지부대신 고문을 겸하게 하여 그의 서명 없이는 국고가 지출 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궁내부에서는 이용익의 권한도 이와 비슷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서층의 폐단에 대해서는 동의 하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매관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공익적 성격이 강하다고 규정했다. 이는 매관을 납속공명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관에 곡식을 주면 그 대가로 비실직의 관직 또는 관품을 주기로하고 곡식의 양에 따라 줄 관직명을 쓸 자리를 비워두어서 공명첩이라 하였다. 공명첩제도가 운영에 비리가 많았지만, 공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공명첩제도가 많이 운영되던 시기는 국가적으로 재난시기에 주로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매관은 대원군에 의해 세도정치가 타파된 뒤 군주가 매관을 주관하는 과도적 과정을 상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5. 대한제국의 성격

 

대한제국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유교국가에서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제국이 있다고 규정할 수 있다. 이는 고종 스스로가 그것을 여러차례 천명하고 구본신참을 주장하면서 유교라는 전통을 지키면서 서양의 법과 질서를 도입하려 노력하였고, 실제로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에 반대하는 연구자들은 대한제국을 유교적 소농사회로 규정짓는다. 이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유교적으로 순화시키고 있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가 결코 소농사회로 정체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식민지시기에 들어서면 경제성장률이 3~4%이상이 되는데, 이는 전근대적 성장에 머물러 있고 게다가 위기에 빠진 경제를 맡은지 10년 정도나 그 이내에 3%이상의 지속적인 성장하는 경제규모로 변혁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성장의 최저점을 식민지 시기이전에 이미 지나왔으며 서서히 발전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대한제국 시기의 훈장


고종과 대한제국이 서구의 근대국민국가를 완전하게 추구하지 않았지만, 대한국국제나 중추원관제개편, 궁내부 중심의 근대화 사업 추진은 비록 그것이 많은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근대사회에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대한제국의 성격을 어느 정도 규정지을 수 있다고 본다.

 

6. 맺음말

 지금까지 고종과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의 논쟁에 대해 간략히 논하였다. 대한제국의 성격은 여전히 논쟁중이다. 하지만 고종과 대한제국을 완전하게 전근대적인 봉건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과도기적 국가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이태진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일제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일제당국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또한 한국시민 스스로가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21세기의 고종과 대한제국의 긍정적인 평가의 시도는 격동의 시기를 암울한 격동의 시기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비록 일제의 침략에 의해 근대방향이 왜곡되었으나 고종과 대한제국이 실시했던 일련의 근대화 정책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의미 한 것(=정체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에 일정부분 기여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 생각된다

 *사진 출처: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5/20100915004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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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시간에 발표한 내용을 수정 없이 올립니다. 오타도 있을수 있고, 맞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수정하지 않고 올립니다. 양이 좀 많아서(A4 14장분량).. 2번에 걸쳐 올리겠습니다..... 댓글은 아마 거의 없겠죠??ㅋㅋㅋㅋ 내용은 광무개혁논쟁에 관한 것입니다. 낙성대경제연구소(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적 연구소)와 이태진 교수의 논쟁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뭐..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고, 이제 몇년지나서 결론 날 것 같기도 합니다. 목차 중에 "들어가는 말" "고종의 개명군주 논쟁" "대한국국제의 성격논쟁" 까지만 이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발표지에 잇었던 각주는 모두 제거한 채로 올립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고종의 개명군주 논쟁 
3. 대한국국제의 성격논쟁 
4. 내장원 중심의 근대사업 
5. 대한제국의 성격 
6.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21세기를 접어들어서 유난히 대한제국 황실을 주제로 한 소설, 드라마나 전시회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2006년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는『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이라는 주제로 사진 전시회를 열었고, 이듬해에는『국립중앙박물관에서 궁-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 궁궐사진전』 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시회가 있었다. 이와 함께 역사학계에서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두고 현재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논쟁이 광무개혁논쟁이다. 광무개혁 논쟁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일련의 개혁에 관한 논쟁이다. 즉 광무개혁의 근대성과 광무개혁의 근대사업들의 성과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크게 고종황제와 대한제국국제, 근대사업들이 있다. 이번 발표문에는 광무개혁논쟁의 쟁점인 고종과 대한제국국제, 내장원 중심의 근대사업, 대한제국의 성격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2. 고종의 개명군주 논쟁

 광무개혁 논쟁에 고종은 이태진 교수나 서영희 교수가 언급한대로 개명군주였지, 아니면 기존의 통설처럼 유약한 군주였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고종에 관한 글은 선교사나 외국고문관 및 윤치호 일기, 황현의 『매천야록』 등에 남겨져 있다. 또한 고종 스스로도 『주연집(珠淵集)』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다룬 연구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다만 고종의 정치적인 분야나 광무개혁과 함께 논하는 글이 있을 뿐이다.

이태진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고종이 개명군주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종이 유약한 군주로 인식하는 것은 일본이 한국식민지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며 이것을 한국 근·현대사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태진 주장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조선의 성리학에서 민국의 개념은 아들이 아버지의 분신이듯이 백성은 왕의 분신이라는 정치이념이지만, 그것이 근대성을 지향적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힘들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종의 문집인 『주연집』의 시에서 존주대의에 충실하겠다는 뜻을 시로 적었다는 것과 황제로 등극한 후 1898년에 중국 삼대이래의 성헌을 담고 있다고 해서 『황명실록(皇明實錄)』을 수보(蒐補)하고 그 서문을 지었다. 또한 1902년에 그가 지은 말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백성을 교화하는 길로서 노인을 공경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노인을 편안케 하면 백성이 편안해지고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해진다. 천하를 다스려 마음을 얻는 것은 이 도에서 의해서다.”

또한 고종은 소중화론의 국제 감각과 성리학의 사회윤리에 충실한 도학군주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은 고종에 대해 어떻게 바라봤을까? 고종에 대해 가장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서양인의 글은 『The Korean Repository』에 실린 기사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1896년 10월호에 게재된 『한국의 국왕폐하』이다.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폐하는 많은 시간과 보살핌을 공무 수행에 쏟으며, 정부의 모든 부서들을 감독, 감찰하면서 아주 부지런하게 일한다. 참으로 어떤 때는 너무 세세한 것들까지 주의를 기울이며, 그리고 모든 일을 살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해낸다는 비평을 듣기도 한다. 그는 대부분의 공무를 밤에 수행한다. 그리하여 대신들, 고문관들과 다른 관리들과의 회의는 종종 새벽까지 또는 그 뒤까지 계속된다.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이다. 

폐하는 진보적이며, 그리고 분명히 동양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우세한 서양의 사람들, 제도들과 관습에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다. 그는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 년 안에 이런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

 이 잡지는 또한 대원군 섭정 때와는 반대로 관용으로 일관하여 이를 그의 통치의 특징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종교문제에서 누구도 간섭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은 선교사에게 격려의 말을 주고 심지어 그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실들을 소개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에게 선생님들을 더 보내달라고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들도 고종의 리더쉽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즉 국가정책의 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의지와 결단력과 추진력을 구비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외세개입을 차단하고 관료사회를 통솔해 근대화 사업을 추진해야 했던 지도자에게는 결정적인 한계였던 것으로 보였다. 또한 이러한 리더쉽의 한계는 각종 근대화 사업 추진에 있어 지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워 잦은 변경과 혼선을 초래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고종이 황제로 오르고, 광무연간에 이루어진 일련의 근대화 사업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강상규 교수는 고종에 대해 승정원 일기를 분석을 통해서 초기에는 서양세계에 대해 화이관념에 근거하여 문명세계와 상극적인이미지로 서양을 이해하였지만. 점차 정치적으로 성숙해져 가면서 청에 파견된 사절의 보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대외정세를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소화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청이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다. 또한 1882년 미국과 수교를 앞두고 청에 대해 왕래 사신제도를 폐지하고 상주사신제도 곧 공사제도를 시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을 볼 때 고종이 성리학적 군주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황명실록의 서문 또한 탕평군주의 정치이념을 따르기 위해서이며 청국과의 관계에서 전통적인 조공책봉 체제를 청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3. 대한국국제의 성격논쟁

 

1899년 6월 고종은 조서를 내려 기존 의정부에서 하고 있던 교정소의 일을 법규교정소(법규교정소)라고 교정소를 새롭게 만들 것을 지시 하였다. 총재에 의정부의정 윤용선, 의정관에 중추원 부의장 서정순 궁내부대신 이제순 궁내부 특진관 조겸호·윤용구등이 참여하였으나 점차 인원이 늘어나 8월에는 리젠드르 브라운 그레이트하우스 등의 외국인 고문관을 의정관으로 임명하였다. 교정소에서는 여러 관제나 법률의 제정 개정은 법규교정소에서 추진하였으며, 또한 조서에서 백성에게 신용있는 규정을 세워줌으로서 본받도록 해야겠다고 하듯이 기준을 마려하려 하였다. 그것이 대한국국제의 제정이다. 1899년 8월 의정원 총재인 윤용선 및 의정관들은 고종이 조서를 내린 그 자리에 국제를 상주하였고, 고종은 이를 재가 하여 반포하도록 하였다. 대한국국제는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법령이다. 대한국국제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온바 자주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립정체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신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이미 행한 것과
        아직 행하지 않은 것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할지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셔 편제를 정하옵시고 계엄·해엄을 명하시나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도 개정하옵시고
대사(大赦)·특사·감형·복권을 명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각항 칙령을 발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치행리(自治行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의          수여 혹은 체탈을 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유약국(有約國)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대한국국제는 만국공법 중에서 『공법회통』에 영향을 받았고, 의거해서 제정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이 만국공법 곧 국제법에 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명시함으로서 대내적으로는 대한제국이 중화질서의 내부에 존재하던 조선과 달리 자주 독립국가이며 황제인 자신은 대한제국의 정치적 구심축임을 천명하고 대외적으로 새로운 문명기준에 입각한 대한제국이 만국공법에 의한 국제질서 곧 근대국제질서에 자주적으로 참여할 정당성을 지닌 행위주체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대한국국제의 법령의 기본적인 특징은 대한제국이 조선왕조의 전통에 의해 전제군주제이며 황제대권을 규정하고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2조에서는 대한제국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3·4조에서는 전제황제권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황제의 전제권은 조선왕조의 성립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절대로 제한하거나 침해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뒤의 5~9조는 전제군주로서 황제가 하는 구체적인 권한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다. 대한국국제가 황제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배경은 국내적으로 황제권이 여전히 군권이 침해되고 위협을 받고 있으며, 국외적으로 일본의 대한정책의 변화와 러시아의 군대파견설 등으로 인해 마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직전과 같은 상황이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국국제를 반포함으로서 대한국국제가 전제군주제를 추구한다는 것을 놓고, 광무개혁 논쟁에서 이를 두고 봉건성과 근대성 그리고 절대성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태진 교수를 비롯한 광무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는 사학자들은 대한국국제가 전제군주정을 명시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봉건왕조를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우선 19세기 유럽의 입헌군주제에서 흔한 일이며, 메이지 일본의 대일본제국헌법을 들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메이지 헌법의 신성불가침의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라고 명시했음을 예로 들었다. 또한 대한국국제가 전문 9조에 불과하지만, 국제가 선포된 이후 회계법을 필두로 육군법, 형법대전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외에도 법률화를 기다리는 많은 시행 칙령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한국국제에는 의회가 명시되지 않았음도 불구하고 9개월전 1898년 11월 2일자 칙령 중추원관제개정건은 황제와 인민협회 추천 각 25인, 총 50인으로 구성되는 중추원을 탄생시키고 이에 법률 칙령의 제정 폐지, 개정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대한국국제 반포 시점에는 심의 의정의 범위를 의정부 대신회의 회부 건에 한하는 것으로 수정했지만, 권한은 동일했다고 주장하면서 메이지제국의회가 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감안하면 중추원제도를 과소평가할 이유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연구자들은 대한제국의 중추원이 국왕의 과세에 대해 국민을 대표해 동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을 표하면서 황제에게 모든 국가의 업무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전제적이라 표현하는 것이 다만 그것이 대한제국이전의 조선왕조와 다른 점은 그 전제적임을 규정화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광무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의 연구자들에게 간과한 점은 중추원 관제 개편이 대한국국제 반포이전에 이루어졌고, 또한 개편이전의 중추원관제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이해는 국제 반포이후 중추원이 거의 무시되었음을 간과한 것이며, 국제선포 이후 일련의 근대법이 더 이상 마련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황제권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었음을 말할 수 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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