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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만주국 대동학원 조선인 학생들에 관한 연구

태풍피해는 없으신지요? 태풍이 지나가는 곳마다 태풍피해가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논문 소개를 하겠습니다. 논문은 2010년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받으신 최충희씨의

논문인 "만주국 대동학원 조선인 학생들에 관한 연구" 입니다.

이 논문을 선택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만주국 출신 인사들이 문화,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
다양하게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치와 문화, 군사 분야에서는 만주국 출신인사들이 많습니다.

만주국 인사들 중 최고엘리트 코스라 할 수 있는 대동학원 출신인사들을

연구한 논문이 여러 개 있는 가운데
최신 논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논문의 목차는 대동학원의 설립부터 조선인들의 입학과정, 규모,

출신배경, 사회진출, 교육, 학생들의 인식, 등이 있습니다.

저자가 대동학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동학원의 조선인 학생들은 현재 확인된 인원은 116명으로

만주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고등관료의 약 50%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동학원이 고등관료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였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대동학원의 조선인 학생들은 이전의 재만조선인과 다른 목적

즉 자신의 출세와 성공이라는 목적을 갖고 만주에 왔고,

이는 기존의 재만조선인사회로 다른 연결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등관료를 지낸 인사들은

광복 이후 남한사회 지도층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규하, 이충환[각주:1], 황종률[각주:2], 조기준[각주:3], 신기석[각주:4] 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대동학원에 관한 연구를 한 것은 최근에 시작했고,

이 대동학원 인사들에 대해 대부분 친일인사로 분류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최충희씨는 대동학원 출신의 모든 인사들을

친일적인 인사로 분류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는 김구가 설립한 건국실천양성소에 대동학원 인사들을 초빙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한 친일행위자로 볼 경우 학원 내의 생활과 관리진출 이후

사회적 활동을 알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대동학원 출신과 만주국에서 관료로 활동했던 인사들이

대한민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만주국시절에 사용했던 구호들은 박정희정권시절에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박정희의 제2경제론 같은 경우에도 만주국의 경제론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논문이 단순히 친일의 논란에서 벗어나 이들 인사들이 어떤 배경에서 만주국으로 갔으며,

만주국에서 관료로 진출했고,

광복이후 이들이 대한민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되짚어 보면서

대동학원 출신인사들의 영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논문은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이나, RISS에서 검색되며,

협정기관에서는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국회 도서관의 전자도서관에서 검색하시면, 목차를 볼 수 있으며,

더불어 서울시립대학교 도서관에 가시면 열람이 가능합니다.

** 모든 이미지는 구글위키백과와 구글에서 검색했으며, 각주는 위키백과사전을 참조하였습니다.**
** 예약 발행입니다.

  1.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만주 고등관 채용고시와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며 충청북도 인사처장 서리, 청주상과대학강사을 역임한 뒤, 정계에 진출하여 1950년 제2,3,5,6,9,10대의 여섯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예산결산위원장을 네 번 역임하고 민주당 정책위 부위장, 민중당 민중당 충북 제7지구당 위원장, APU 제2회총회 한국대표, 민중당 정책심의회의장, 민중당 운영위원, 신민당정무위원ㆍ정책심의회의장ㆍ전당대회의장ㆍ총재권한대행ㆍ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2. 한성부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고, 만주국 대동학원을 거친 뒤 뒤 만주국에서 관리로 근무했다.[1] 직책은 만주국 경제부 금융사의 금융과 사무관으로, 경제 분야 관료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왔다. 연희대학교 교수를 잠시 지내다가, 다시 경제 관료로 복귀했다. 제3공화국에서 대한민국 재무부와 대한민국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71년에 민주공화당 비례대표로 제8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었으나, 국회의원 임기 중 사망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해외 부문에 선정되었다. [본문으로]
  3.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함흥농업학교를 나와 일본 쇼치(上智)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42년 만주 창춘(長春)대동학원 연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해방 후 연희전문대.서울대를 거쳐 고려대 교수를 역임했다. [본문으로]
  4. 경상북도 안동군 출신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33년에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약 4년 동안 모교 법문학부 연구실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이후 만주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만주국 관리가 되었다. 신기석은 국문원 산업부 개척총국 척간처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만주에서 조선인을 지도하는 직책을 맡았다.[2] 《반도사화와 낙토만주》(1943)에 〈눈강지구의 조선개척민 선유대〉를 기고하는 등 일본의 만주 침략과 조선인 이주 정책에 따른 이론적 발판을 마련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학계로 돌아와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학장과 중앙대학교 법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에 추대되었다. 1963년 부산대학교 총장, 1968년 영남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10월 유신 성립 후인 1973년에는 부산에서 출마하며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민주공화당 국토통일위원장과 10·26 사건 이후 1980년에 조직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대한국제법학회 이사와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1981년에는 학교법인 선인학원의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학술원상,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과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동양외교사》, 《근대외교사》, 《한말외교사 연구》, 《북정일기》 등이 있다. 간도 문제 전문가이며 대표적인 민족주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인 신기석이 만주국 관리였고 만주국 건국 이념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해외 부문에 신기석을 포함시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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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인듯합니다...


토요일(6일), 저희 학교 교수님이자,
제 논문 지도 교수님이신 황민호 교수님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신 연구단체인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가 창립하였습니다. 저는 부랴 부랴 늦게 참석해서,
 다 참석하지 못하였고, 

중간에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참석할 수 있다는 것만해도 다행인듯합니다.

내년이면 만료가 되는 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실무진 중심으로
연구단체가 조직되어 일제시기 강제동원에 대해

계속해서 연구발표 할 수 있는 단체가 생겨
그나마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는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일제시기 연간 500만명이상이 동원되어 군속과 노무자로 타국에서 일해야했고,
많은 분들이 돌아오지 못하거나,

패전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기도 하였던 그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단체입니다.
하지만, 일본정부와 기업은 현재 이들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 갔었는지, 밝히기는 커녕 은폐하기 바쁩니다.

저도 잠시 위원회에서 일했지만, 명부를 보면서 많이 가셨구나...
많게는 10년 넘게 노무자와 군속으로 생활하신분들의 명단을 봤는데..

참 그랬습니다... 전쟁이 무엇이기에.. 그분들을 그렇게까지 죽음의 땅으로 몰고 갔고,
돌아오지 못했을까? 또한 나중에는 학살되기도 하였고,  심지어 군속으로 강제동원 되신분들은
전범재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하더니.. 세월이 너무 흘러서 밝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점점.. 우익이 강해지고 있는데...

관련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19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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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중심으로 본 한국과 독일의 역사적 관계

 

1. 머리말

2. 아담 샬(Johannes Adam Shall)과 소현세자(昭顯世子)

3. 광복 이전의 한국과 독일의 관계

1) 흥선대원군과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 ·독수호조약체결과 대()조선정책

2) 묄렌도르프(Möllendorff)

3) 조선을 다녀간 독일인들

4) 독일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

4. 광복 이후 한국과 독일의 관계

1) 서독과 한국의 외교관계 재수립

2) 파독 광부와 간호부의 이해

5. 맺음말

 

1. 머리말

독일(獨逸)의 정식 국명은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이다. 원래는 세계2차 대전 이후 서독만을 일컫었는데, 1990103일 동독(독일민주공화국, Deutsche Demokratische Rebublik: DDR)과 공식적으로 재통일되면서 정식국명이 되었다. 현재 독일은 면적 약357,023(남한: 99,000)이고, 인구는 2010년 현재, 8,180만 명(외국인 720만 여명)이며, 16개의 연방주로 구성되어 있다. 공식 언어는 독일어이며, 독일어는 세계에 출판언어의 18%와 학술 언어로는 2번째로 많이 쓰인다.
한국과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것을 함께 공유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독일과 한국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이 보고서는 한국과 독일의 접촉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어보면서 독일과 한국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2. 실학(實學)과 서학(西學) 그리고 독일인과 접촉

  서학을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한 학자는 이수광(李睟光)이었다. 자신의 저서인지봉유설(芝峯類設)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요약하여 천주교를 고색하면서 제 2제국부·외국(諸國部·外國)에서 독일에서 대해서 백옥(白玉)으로 성을 쌓는다고 하였다. 실제로 독일인과 교류한 조선인은 조선의 왕세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중국에 머무는 동안 북경에서 당시 중국명 탕약망(湯若望)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 독일인 신부인 요한네스 아담 샬(Johannes Adam Shall 1591-1666)과 친교를 맺었다. 당시 아담샬은 북경주교 겸 흠천감정(欽天監正)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아담샬과 소현세자는 편지를 나누면서 서양문물에 관심이 있는 소현세자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기도 하였다. 소현세자가 아담샬과 친분을 갖게 된 것은 천문학을 배우기 위해서였고, 그러면서 자연히 친분을 쌓게 되었다. 특히 소현세자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자, 아담샬은 자신이 지은 천문(天文), 산학(算學), 성도정교(聖道政敎)등의 서적과 함께 천주상(天主像)을 함께 선물했으며, 소현세자는 편지로 선물은 고맙지만, 천주상에 대해서는 가져갈 수 없다면서 사양하였다.

다음으로 독일인과 접촉했던 인물은 북학자로 유명한 홍대용(洪大容)이다. 홍대용은 1765(조선 영조 41) 35세 때 숙부인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한편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또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인(또는 오스트리아출신)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August von Hallerstein,1703-1774,劉松齡)과 흠천감 부감(副監) 포우관(Anton Gogeisl, 1701-1777 鮑友管) 등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기도 하였다. 18세기의 예수회 신부인 아담샬과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의 접촉은 국가대국가의 접촉은 비록 아니었지만, 독일과 한국사이의 관계가 근대이전에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3. 광복 이전의 한국과 독일의 관계

 1)흥선대원군과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독일인과의 접촉은 19세기에 이르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의사로 종사하던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가 일본에 표류한 한국선원들과 면담을 통해서 한국에 관한 내용은 자신의 저서 일본Nippon에서 소개하였으며, 다음으로 한국개신교회사에서 중요한 선교사인 칼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목사의 내한이다. 1852년 암허스트(The Lord Amherst)호를 타고 산동을 거쳐 한국에 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황해도에 와서 관헌과 접촉하다가 통상을 실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서해안을 돌면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를 거쳐서 항해한 경험을 중국 연안 항해일지(Journal of Three Voyage along The Co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the Loo-Choo Island)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 제 5장에 서 한국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후 한국과 독일인의 접촉은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 도굴 사건으로 유명한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이다.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중국명:載拔)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고 했던 것은 조선과 통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총 3차례에 걸쳐 조선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조선연안에 도착한 것은 1866년 음력 2월 아산만이었다. 아산만에 도착해서 그는 당시 관리인 현감 김응집(金膺集)에게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김응집은 통상은 국법으로 금한다고 하면서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통상을 요구하는 편지를 전하고, 풍속을 살핀 후 15일 만에 떠났다. 두 번째 방문은 1866년 음력 6월 다시 아산만에 도착하여, 통상을 요구하다가 다시 강화도 승천보로 이동하여 정박하였다. 이에 관리들이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자, 오페르트는 직접 자신이 서울로 갈 것을 말하게 되었다. 이에 중앙정부는 통역관을 보내게 되었으나, 대원군은 통상을 허락하는 청국(淸國)황제의 조서를 갖고 올 것을 요구하자 일행은 할 수 없이 떠났다.

세 번째는 상하이에서 천주교 박해 피해서 탈출했던 프랑스 리델 신부와 페롱 신부,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인 최선일 등을 만나면서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원군을 정신적으로 압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침 충청도에 있는 대원군의 생부의 묘를 파서 유물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1868년 음력 4월 조선인 천주교인의 안내를 받아 일행은 무기를 들고 덕산군청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난후 남연군의 묘가 있는 가동(伽東)으로 가서 도굴작업을 하였다. 하지만, 도굴작업을 하다가 묘안에 있던 큰 바위로 인하여 도굴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면서 민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떠나면서 영종도와 동검도 사이에 정박하였고, 이에 관리들이 오자, 대원군에 보내는 서신을 보내었고, 이에 대원군은 친서를 보내어 통상을 거절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A Forbiddenn Land: Voyage to Corea)을 저술했다.

1) ·독 수호조약 체결 및 독일의 대()조선정책

  공식적으로 독일과 통상조약이 조인 된 것은 18841126일이었다. 이 조약은 한국인이 처음으로 서양국가와 직접조약을 체결 한 조약이었다. 하지만, 정식 조약 체결이전에도 18706월 도쿄 주재 독일공사 막스 폰 브란트를 통해서 통상조약을 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8825월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과 같은 해 6월 한영조약이 체결되자 독일측의 통상시도가 재개 되었고, 1882630일 한독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비준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1884년에 가서 비준이 되었는데, 이는 치외법권에 대한 독일의 불만족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비준이 늦어지는 동안에도 브란트 공사는 통상조약이 발효되기 이전부터 자국 상인이 조선 내에서 통상활동을 가능하도록 요청하도록 하였다. 이는 영국과 미국등과 비교하여 독일인 상인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볼 수 있다는 염려에 따른 조치였다. 즉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적 이익 확보라는 측면과 다른 강국과의 세력 경합이라는 두 가지 사항을 모두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의 독일의 대()조선정책에 대해 살펴보면 독일은 당시 국내의 경제적인 위기를 해결과 독일 산업화진행에 필요한 원료와 시장 확보 차원에서 시장개척에 나섰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관심을 가졌으며, 조선은 부차적인 지역이었다. 특히 독일인의 생활과 교역을 보호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했으나, 조선에서의 경제적인 이해는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맞물려 있어서 정치적인 상황과 분리될 수 없었다.

2) 묄렌도르프(Möllendorff)

  개항기 조선과 독일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묄렌도르프(Möllendorff 1847-1901)이다.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8212월이다. 묄렌도르프는 당시 청국 세관직원으로 중국에 있었는데,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고빙(雇聘)되었다. 당시 조선은 외국과 통상조약으로 말미암아 세관문제가 크게 부각되었지만, 근대적 세관업무와 해관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1881년 동지사로 간 이용숙(李容肅)은 이홍장을 만나 그에게 관세문제에 대해 충고를 구했다. 이에 이홍장은 세관업무를 위해서 서양인을 고용할 것을 충고했지만, 조선의 서양인에 대한 심리적 거부로 중국측 인물을 주선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추천했는데, 이는 청국이 일본의 조선해관과 세관업무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외교책으로 추천했다고 할 수 있다.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웠으며,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미리 연습한 한국어로 문안인사를 했다. 입국한지 몇 일후 묄렌도르프는 집(현재 수송동 지역/)과 관복을 받았다.

그가 처음으로 한일은 정치자금으로서 중국으로부터 1백만 원의 차관을 얻기 위해서 묄렌도르프는 사절단을 인솔하여 상해로 갔다. 또한 조선에 거류하고자 하는 상인들과 접촉하고, 조선의 견직을 개량하기 위해서 10만주의 뽕나무를 사서 조선에 심게하고, 독일인 마르텐스(Martens)로 하여금 서대문 안과 부평에 양잠 공장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이어 의학교를 설립할 의사도 구했다. 18834월에는 고종으로부터 해관에 관한 총책임을 맡는 총 세무사로 임명 받았다. 그는 민중의 권익을 높이고 생산능력 있는 공업을 일이키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838월 키일 대학의 지질교수 고체박사가 동경대학에서 방한하여 전국지질 조사를 했으며 이를 토대로 한강의 백사(白沙)를 이용해 유리공장을 설립하게 하였다. 그리고 상해에서 하륜선을 구입하기도 하였으며, 복잡한 화폐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인천에 있는 독일상사인 세창양행을 통해서 조폐기를 주문하기도 하였다. 전환국(典圜局)이 설치되면서 그가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인의 교양을 높이기 위해서 공립학교와 관립영어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의 주 업무는 외교업무였으므로 한미, 한영, 한독조약 체결에도 참여했으며, 가능한 많은 서양나라와 수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국열강이 많을수록 조선이 일본과 청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852월 일본을 방문하여 조선군대를 훈련시킬 교관으로서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대신들이 이 계획에 반대하였고, 대신에 미국인 교관을 초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문에 한로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졌으며, 일본 중국 영국의 신문들은 묄렌도르프를 비난하였다.

거문도 사건이 1885년도 일어나자 그는 즉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ch)호의 제독에 해명요구를 하였으며, 정부유사 엄세영과 일본으로 건너가 영국제독에게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영국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청국에 묄렌도르프를 소환시켜줄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에는 협판교섭통상사무직을 내어놓고, 이어 해관 및 총세무사직을 내어 놓고, 188512월 청국으로 따났다.

묄렌도르프는 자신의 수기에서 당시 한국의 사회대한 견해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정부에 대해서는 우선 노론 중심으로 한 강력한 내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안정된 정부 안에서의 행정질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또한 재정분야에서 조세균등주의를 주장하고, 화폐개혁을 주장하였다. 사법분야에서는 새로운 법으로 대체해야하며, 그 법문(法文)은 한글전용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사법과 행정의 분리를 이야기하였다. 교육분야에서는 조선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 한국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면서 한문 중심의 중국식 교육에서 개화된 서구식 교육제도로 전환을 주장하면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이어 농업, 공업 분야에서도 나름의 주장을 하였다.

  3) 개화기 시기 조선에 살았던 대표적 독일인

  조선이 독일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독일인들이 조선에 정착하거나, 오고가는 경우가 생겼다. 독일공사는 물론이고, 사업가, 선교사, 기자, 의사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당시 독일황태자였던, 하인리히(Prinz Heinrich)의 방문도 있었다. 여기에서는 대한제국의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와 손택(孫澤)호텔로 유명한 앙뜨와네뜨 존타크(Antoinette Sontag),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먼저 프란츠 에케르트는 먼저 일본에서 해군 군악대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일본국가(현재의 기미가요)를 작곡한 일도 있었다. 그가 한국의 시위대 군악대장으로 고빙된 것은 19012월이었으며, 그해 6월에 처음으로 완전한 서양식 군악대를 구성하고, 같은 해 9월 고종황제 50주년 탄신 축하연에서 대한제국 국가를 처음 연주하였다. 그가 작곡한 대한제국 국가는 서양인으로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멜로디를 살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어 찬송가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하고, 음악교육의 공로로 대한제국으로부터 태극훈장을 받았으며,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으로 그도 물러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독일의 극동학회의 주재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회현동)에서 살다가 1916년에 사망, 양화진에 묘역에 안장되었다.

손택호텔은 당시 서양식 최초의 호텔이었다. 손택 호텔의 경영자는 러시아 영사 웨베르의 부인의 동생이 존타크였다. 존타크는 18858월에 한국에 처음 왔으며, 이어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민비에게 소개 되어 궁중의 외국인 접대를 전담케 하였다. 또한 당시 궁중에 처음으로 서양요리를 소개하고, 서양식으로 창덕궁을 꾸미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관계에서도 존타크는 당시 러시아 영사인 웨베르와 함께 명성황후를 만나 비밀협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들통나기는 하였으나, 나중에 더욱더 신임하게 되어, 정동 27번지 184평의 저택을 하사였다. 이때 존티크는 2층 양옥을 짓고 손택호텔이라는 이름으로 경영하였다. 그리고 이 호텔을 중심으로 유력한 내외 인사들이 친목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정동구락부라고 불렀다. 이후 이 호텔을 자주 드나들던 이완용, 이윤영, 이범진 등은 을미사변 직후 웨베르와 함께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과 함께 존티크는 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그가 운영하던 호텔도 이화학당에게 넘어갔다. 이후 러시아에서 사망하였다.

4) 독일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

  대한제국이 1910년 일본과 강제병합이 되면서 독일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단절되게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 다시 독일 영사관이 열리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독일과 한국의 외교관계가 아닌 일본과의 외교관계였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도 간접적으로 독일과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적교류였다. 특히 독일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독일인들도 종교적인 이유로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이 장에서는 독일에 유학한 대표적인 한국인과 원산의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활동한 독일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독일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김중세(金重世)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8년 베를린대학에서 유학, 철학과 고전학을 전공했으며, 1923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08년 베네딕트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이후 한국인과 독일인 사리에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독일로 유학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측될 뿐이다. 그리고 안중근의 집안도 독일인 신부와 자주 내왕하면서 안중근의 사촌인 안봉근의 경우 1910년대 독일에 머물고 있었으며, 독일인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이미륵으로 유명한 이의경(이미륵)이 있으며, 특히 192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독일유학은 일본여권만 취득하면 유학할 수 있었다. 이때에 독일로 유학생을 보내는 기관이 영남의 안희제(安熙濟) 등 영남 유학유지들이 기미육영회를 결성하여 청년들을 유학시켜 구권회복의 대들보로 양성하려하였다. 이때에 1차로 김정설, 이병호, 이재만, 전진한, 문시환 5명이 선출되었고, 전진한은 일본으로 이극로와 안호상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이극로는 당시 1828년 베를린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27년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 김법린, 이의경과 함께 출석하여 한국의 독립성 Die Unabhängigkeit von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기도하였다. 이의경(이미륵)은 독일에서 잘 알려진 한국문학가이다. 이미륵은 1920년 독일에 도착하여 1928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그래팰링 지역에서 문화인 단체를 조직하여 문학 토론회와 발표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압록강은 흐른다1946년에 출간되었고, 만년에는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의 한독교류에서의 공적은 한국사상과 문화를 유럽에 독일어로 소개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27년에는 한국어 문법을 탈고하였으며, 독일 잡지 아틀란스에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과 사진을 소개하고, 1940년대에는 신문에 한국의 문화, 정치를 기사화하기도하였다. 또한 단편소설 30편과 장편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통해 한국을 알렸다. 특히 그의 글은 오늘까지도 독일 고등교과서에 실려 있으며, 독일에서 발간된 세계문학사전에 등록되어 있다.

독일현지에서는 주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면, 식민지 조선 내에서는 로마가톨릭 수도회 중에 하나인 베네딕트 수도회를 중심으로 독일인과 교류가 이어졌다. 강제이후 베네딕트 수도회는 새로운 포교지를 찾기 시작했고, 19201월 원산을 베네딕트의 새로운 포교지로서 설정되었다. 당시 수도원을 원산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하였는데, 파리외방선교회가 이 일을 갖고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1925년에 원산으로 수도원본부를 옮겨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이 수도원을 원산으로 옮긴 것은 일부인원으로는 서울보다 큰 원산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에 제약이 있을 것이고, 또한 교육 사업에 있어 교사를 필요로 했으므로 수도원을 옮김으로서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우어(Bonifatious Sauer),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 노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수녀회 등이다. 안드레 에카르트는 1908년에 서울에 도착하여,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를 가르쳤으며, 한국어가 총독부에 의해 금지된 때에도 한국어 연구에 몰두하였고, 후에 독일에 돌아가서, 뮌헨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어문법(1923), 한국 미술사(1929) 한국의 음악(1930)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노베르트 베버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Im Lande Morgenstille)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베네틱트 수도회에 총 원장으로서 한국에 방문하면서 지방의 풍습과 문화를 보고 필요하다면 유럽에 알리기 위해서 4개월 동안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의 백동수도원, 종현대성상, 용산 신학교, 하우고개, 수원, 안성, 미리내 성지, 공주, 해주, 등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반드시 사진기와 그림도구를 휴대했다. 이후 1915년에 책으로 출판했으며, 나중에 영상집으로도 나오기도 하였다.

  4. 광복 이후 한국과 독일의 관계

  1) 서독과 한국의 외교관계 재수립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후 독일과는 바로 외교 수립이 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412한국에서의 독일 적십자병원에 의한 원조에 관한협정을 미국과 체결하고, 부산에서 야전병원, 의료봉사 및 UN안전보장 이사회의 긴급 구호 계획에 관한 결의에 따라 47,619달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54101일 독일의 레메겐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 총영사관을 한국무역대표부로 승인하였다가 195512월 한국과 독일의 양국이 상호 국가 승인을 하기에 이르러 완전히 외교관계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과 한국은 총영사관으로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는 당시 서독정부가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믿지 못했고, 이승만정권이 부패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1957년 양국 정부는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독일의 영사관에서 공사관으로 승격하고, 다시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과정에서 독일정부와 한국정부간의 외교관계 수립과정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독일정부와 관계수립에 있어, 분단이라는 정치적 관계를 우선시하는 것이 보이지만, 독일은 미국의 원조 재정의 재정적 어려움의 타결을 위해서 독일이 서게 되었고, 독일이 한국에 투자 이익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외교관계를 재수립한 것이었다. 또한 외교관계 수립에 있어 독일은 영사관의 업무와 함께 통상대표부로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독일 기업의 한국내의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외국 경쟁기업과의 사업수주에서 어려움이 보고되자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서 이를 고려하게 되었고, 대표부를 승격하기에 이른다. , 한국은 정치적인 목적과 원조경제 목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던 반면, 독일은 정치적인 목적보다는 전후 복구 사업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것을 최우선 목적이었다.

2) 파독 광부와 간호부의 이해

파독 광부 및 간호부가 공식적으로 1963년부터 1975년까지 광부는 7,936명 간호부는 11,057명이었으며, 이들이 국내로 보낸 송금액은 공식파견 기간 내에 101,530 달러 당시 총 수출액의 1.6-1.9%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부의 정부 파견은 당시 미국의 원조지원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차관도입이 시급했고,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고급인력과 숙련공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서독과 기술원조협정을 체결(1961), 및 경제원까지 포함하는 협정을 체결하면서 파독광부와 간호부가 공식적으로 파견되었다.

원래 파독광부 및 간호부는 민간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독일의 가톨릭 신부와 개신교 계통의 신자들인 이수길 박사, 이종수 등의 주선으로 이뤄졌으며, 서독의 지속적인 간호사 부족으로 대규모의 수요가 발생하자 정부행정기관인 한국해외개발공사가 전담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로서는 당시 고학력자 실업률을 줄여서 사회적 안정을 이루려는 목적 하에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시에 기술 습득과 외화획득이라는 목적도 이루고자 하였다.

이들은 광부와 간호부는 1969년 동백림 사건을 기점으로 점차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독일 자국의 산업변화도 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광부고용에 있어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에서 고용하기 보다는 인접국에서 고용하는 것을 점차적으로 선호하게 되었고, 한국정부가 동백림 사건에 연류 된 광부들을 서독정부의 승인 없이 자국으로 송환하자 파독 광부를 유입을 독일정부가 중단하기도하였다.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계약기간을 줄이면서 점진적으로 파독광부는 줄어들게 되었다. 간호부는 이와는 조금은 다르게 줄어들게 되었다. 당시 간호부 파견은 정규 간호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독일 내에서 간호사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자, 점진적으로 임금이 독일 내국인과 차이가 거의 없어지게 되자, 자국인을 병원에서 선호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수요가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일부 논문과 언론에서 파독광부와 간호부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의 상업차관을 도입했다는 글과 책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2008년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밝혀졌다.

5. 맺음말

한국과 독일의 관계는 멀리는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만남까지 올라간다. 독일과 한국의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근대적인 조약인 조·독통상조약이 체결되기까지 국가 간의 접촉보다는 개인적인 접촉 속에서 이루어졌다. 근대적인 조약 이후에도, 국가 간의 접촉도 있었지만, 민간의 교류가 더 많았던 국가이기도하다. 다만 의외의 경우라면, 외교적 체결에서, 한국정부는 주로 정치적인 사안에 관심을 두고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고자했다면, 독일정부는 경제적인 이익을 두고 외교적 관계수립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독일의 정부의 경제적인 이익에 중점을 둔 외교관계는 정치적인 문제까지 함께 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21세기를 맞아 한국과 독일은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독관계 수립을 맞이하고 있으며, 한국은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많은 부분을 독일 정부의 통일 정책을 자문하기도 한다. 라인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한국과 독일이 다가오는 새로운 미래에는 더욱더 많은 인적교류를 통해서 양국에 교류가 많아져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양국이 더욱더 관심을 갖고, 교육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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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썼던 글입니다. 수업발표용으로 있었는데... 오늘은 요걸로 대신합니다...
각주는 다 제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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