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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던 주말... 한국의 집에 갔다가.. 그냥 외부만 담았다.. 

원래는 박팽년의 집이었으나, 일제시대는 조선총독부의 고위직인 정무총감 사저였다.. 

그러다가 지금에는 한국문화를 홍보하는 공간으로 바꾸어졌다. 


총독부고위직 관저였던 건물은 이외에도 많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청와대도 원래는 경복궁안에 있던 공간이지만, 일제시기 조선총독의 사저였다.

그래서 문민정부때 김영삼 대통령이 총독부 건물을 허물면서, 청와대 건물 일부를 허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집은 인기 드라마 "신의 만찬"의 촬영지라는 것...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정무총감의 사저였다는 글은 보이지 않는다. (위의 더보기를 누르면 관련 설명을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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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학위논문 중간발표 시간에 받은 요약본...

나도 다음학기에는 이거 해야하는데....


*논문제목은 아직 정식적으로 통과되지 않는 논문이기에.. 흐리게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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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쓰지(布施辰治 후세 다츠지)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이후 몇 분들께서 그의 한국에 대한 인식에 대해 궁금하신 것 같아, 한국근현대사학회에 실린 논문인 「후세 다츠지(布施辰治)의 한국인식/이규수/한국근현대사학회, 2004」나를 요약해서 포스팅합니다. 후세에 대한 한국인식이 꼭 이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의 유고집과 자료집을 분석해서 쓴 글일 뿐입니다. 다만, 후세의 자료가 현재 메이지대학교(明治大學校)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자료가 나중에라도 온전히 번역되어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한 외국인의 유공자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1]

지금 소개하는 논문은 작년 가을에 출판된 『후세 다츠지』(오오이시 스스무, 고사명, 이규수 지음/임희경 옮김)라는 책 뒷부분에도 실려 있는 것을 논문으로 먼저 발표했던 것입니다. 논문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지 않고, 논문의 일부분만 요약했습니다. 차후에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 실린 논문을 찾아보고, 다시 실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개인적으로 이 글이 현재 블로그에 실리는 역사부분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글은 도플파란의 歷史이야기라는 블로그에 실을 예정입니다. 내용이 어려운 것 같아서.. 각주를 대부분 달았습니다. 일본어 위키백과와 네이버백과사전을 참고했습니다.

블로그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전에 실지 못했네요..ㅠㅠ 지금에서야 올립니다. 뉴데일이 신문을 좀 안보고 싶은데.. 너무 자극적인 제목때문에 저를 이끌어서 그거 읽고, 폭풍의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늦었다고 변명해봅니다. 김필재 같은 사람이 왜 역사를 운운하지는지....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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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는 묵자의 겸애주의와 자유민권운동의 지지자였던 부친영향을 받았고, 후에는 그리스도교 및 톨스토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메이지 법률학교에 재학 할 때에 일본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과 대만인 유학생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그가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들 역시 자신의 입신출세보다 조국을 염려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들과 교류하였던 조선인 유학생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1911년 일본에 의한 한국강점을 비난하고 조선인과 조선독립에 대해 논의했고, 그가 작성한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문장 때문에 검사국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후세가 직접적으로 관심을 나타낸 것은 1919 3.1운동 전후 시기로 보입니다. 후세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2]의 고조를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분출된 보통선거운동과 사회단체의 결성을 계기로 전통적인 변호사로부터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하겠다는 장문의 자기혁명의 고백을선언하였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이다. 나는 그 소리에 따라 엄숙히 자기혁명을 선언한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전사(戰士)라고 말할 수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회운동에 투졸(鬪卒)한 변호사로서 살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에 옮기겠다.”

 

또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민사와 형사 사건을 불문하고 다음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만 변호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1.     관헌에게 무실한 죄, 부당한 부담을 강요 받은 사람의 사건

2.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람의 사건

3.     관헌이 진리의 주장에 간섭하는 언론범 사건

4.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투쟁하는 무산계급의 사건

5.     인간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사건

6.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

 

이는 일본 내의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인과 대만인을 향한 선언이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인 운동가와 사상가와의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로 식민지문제와 피억압민족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는데, 이점에서 후세는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명배경에는 물론 1919 2월 도쿄에서 거행된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과 이어서 조선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여파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후세는 일본 내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무산정당운동, 수평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이와 더블어 1921년 고베의 미츠이·가와사키조선소의 파업사건에 지원을 계기로 야마사키 게사야 (山崎今朝彌)[3]와 함께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변호활동을 전개하였다. ‘자기혁명의 고백을 전후로 2.8독립선언으로 검거된 최팔용, 백관수 등 9명에 대한 출판법위반 사건 제2심 변호인이 되었다. 결과는 징역 9개월 이하의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조선인들은 무료로 변호를 담당한 후세에 대해 큰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제일 잘 나타난 문장은 일본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 창간호에 개재된 무산계급으로부터 본 조선해방문제에 대한 설문회답이다. 일본인 27명의 회답을 게재한 <<아키히타>>는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한국인식을 검토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즉 그들은 조선민족의 독립은 무산계급의 해방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후세의 문장도 이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어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오늘날 일본 자본주의 아니 세계 자본주의는 아직 무너지지 않고, 더욱 단발마적인 북위를 떨치고 있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인해 침략당한 조선민중이 더욱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소위 민중의 착취와 압박에 죽어가는 것은 조선민중만이 아니다. 세계의 무산계급이 착취당하고 극도의 압박을 받아 죽어가고 있다. 유독 조선민중의 착취와 압박이 눈에 띄는 것은 무대가 무대인 점과 미명 아래 병합된 병합이 실로 너무나도 선명하고 참혹한 잔학상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민중에 대한 착취와 압박이 특히 눈에 띄는 이유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철저한 무산계급의 문제는 원래 세계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를 구체화하는 도화선이 된 것은 바로 무대와 기회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일반에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은 통절하게 우리 일반 무산계급의 마음을 울리고, 조선민중이 철저한 무산계급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9123 7월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했으며, 조선유학생 단체인 북성회[4]와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하기순연강연회에 참가히기 위해서 방문했다. 그는 첫 담화를 통해서 방문목적을 분명히 했다.

 내가 이번에 조선에 온 것은 가장 굶주린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먹을 것을 구하듯이,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한다는 조선사람들을 만나보면 인간생활이 개조되지 않으면 안될 이상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궁경에 빠진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과 만나보는 것은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의 경치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기분에 접촉하고자 한 것이 내 방문의 주요한 목적입니다.[5]

 

그는 조선방문 중에서도 의열단원인 김시현의 재판을 변호하였고, 강연 때문에 변호를 하지 못할 때에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변론요지를 김시현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귀국하자 얼마 뒤 1923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 학살사건을 조사 고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국의 방해공작으로 진상을 정확히 규명할 수도 없었고, 조사결과를 발표할 수도 없었다. 10월 결성한 도쿄지방이재조선인후원회에 고문과 12월에 개최된 피살동포추모회에서 추모연설을 하였다. 아래의 글은 추모연설의 일부분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중에는 조선에서 온 동포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 저는 애도할 말이 없습니다. 또 어떤 말로 추도하더라도 조선동포 6천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슬퍼하는 천만 개의 추도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그 사람들의 무념에 가득 찬 마지막을 추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살은 계급투쟁의 일단이었습니다. 우리의 계급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졌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왜 우리가 졌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 후 그는 1926 3월 두 번째로 조선에 방문했을 때 도착직후 관동대지진에 대한 사죄문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우송했다. 그가 보낸 사죄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가면 모든 세계의 평화가 모든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 무산계급해방 운동자는 설령 일본에 태어나 일본에 활동의 근거를 두고 있어도 일본 민족이라는 민족적 틀에 빠져들지 않으며, 또 실제 운동에 있어서도 민족적 틀에 빠져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진재 직후의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한 솔직한 나의 소신과 소감을 모든 조선동포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동포들에게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합니다.

 

1927년 그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6]을 변호하기 위해서 조선을 방문했다. 그때 변호인인 허헌, 이인, 김병로를 중심으로 한 변호인단에 참여하였다. 그는 공판을 앞두고 사건 관련자 101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발송했다.

 

금년은 무척이나 덥습니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을 찾을 자유도 없고 여유도 없는 자에게는 신문보도처럼 정말도 살인적인 더위입니다. 여러분의 옥중에서의 근황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공산당사건은 재일 조선동포의 의뢰도 있었고, 저번 조선에 갔을 때 잘아는 친구로부터 변호 요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뢰가 없더라도 여러분이 왜 이번 공산당 사건에서 검거되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공산당사건의 중대한 의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법정투쟁과 항의에 협력할 것이 저의 의무라는 것을 통감합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의 공판법정에 서서 저의 성의를 피력하겠습니다.

 

공판은 9 13일부터 일반방청이 금지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그는 도쿄에서 대기하면서 재일조선인이 주최한 조선총독폭압정치 비판연설회에 연사로 참가했다. 이후 공판이 절정에 달하던 10 8일 후에 조선에 건너왔다. 조선에 오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解放>이라는 잡지에 실었다.

 

공산당사건의 번호는 단순한 형사사건이나 재판사건의 변호가 아닙니다. 사건의 내용과 사실은 밝히지 않겠지만, 대강을 이야기하면 공산당사건의 진상은 총독폭압에 대한 일종의 반항투쟁입니다. 이 사건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입니다. 현재 법정에 서 있는 100 여명의 피고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법정에 서 있는 피고는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하는 조선동포를 대표한 최전선의 투사가 적의 포로 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후에도 많은 사건들을 변론하였고, 후에는 변호사를 박탈당하고, 등록말소도 당하였다.

 

그의 장례식의 어느 조선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 조선인에게 정말 아버지 맏형 같으며 또한 구원의 배와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영원히 선생님과 이별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픈 일입니다.



[1] 2011 8 11일 독립기념관에서 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에 후세 다츠지에 관련된 논문이 발표되었고, 이외에도 외국인이 한국독립운동을 도와준 외국인들에 대해 논문을 소개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는군요. 개인적으로 늦게 알아서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자료집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http://media.daum.net/press/view.html?cateid=1065&newsid=20110810100913585&p=newswire

[2] 大正デモクラシ 러일전쟁 때부터 다이쇼 천황 때까지 일본에서 일어났던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민본주의에 의거하였으나 실질적인 정치, 사회 체제로 정착하지 못하고, 군부를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쇠퇴하였다.

1기는 1905년부터 1914년까지로, 1905년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데 반대해서 일어난 시민운동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그 후 군비확장 반대운동과 악세 폐지운동, 1913년의 제1차 호헌운동 등을 거치면서 제국주의의 색채가 약해지고 민주화가 진전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비특권 자본가 계층과 도시 중간 계층이 주도하였으며 그들은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중국 동북 지역을 포기하자고 주창하였다.

2기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지방 중소 도시에서 중간 계층을 중심으로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시민조직이 나타났으며 언론도 민본주의를 고취하였다. 민본주의를 체계화한 요시노 사쿠조는 보통선거와 내각제,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를 존중하자고 주장하였으며 무력에 기반한 팽창정책을 배척하였다. 3기는 1918년부터 1925년까지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데다 쌀 파동과 러시아혁명, 국제노동기구 설립 등의 영향으로 민중의 자각이 높아진 시기이다. 노동자, 농민의 조직이 급속하게 발전하였고 보통선거 운동은 국민운동이 되었다. 또한 평화에 대한 열망도 높아져 육ㆍ해군은 군비를 축소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기반으로 정당이 발전하였다.

한편 지배층은 민중의 불만을 무마시키려고 의회정치를 받아들여 1924년에는 다수당을 차지한 헌정회의 총재가 총리가 되어 내각을 구성하였다. 결국 보통선거법을 실현시켰으나 추밀원ㆍ귀족원ㆍ군부 등 의회정치를 제약하는 기관을 폐지하거나 축소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정치 자유를 제한하였다. 이처럼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요구한 정치적 자유는 왜곡된 형태로 실현되었으며 그나마 1930년대에 들어서 군국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의회정치와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유산은 후에 일본 정치 체계의 골격을 이루는 데 영향을 끼쳤다.

[3] 1877長野県岡谷市旧諏訪郡川岸村出身上京後明治法律学校・明治大学)にび、1901年卒業同年第1回判事検事登用試験合格弁護士試にも合格)、司法官試補となり甲府区裁判所詰となるも翌年依願免し、1903年渡米赤羽一岩佐作太徳秋水らとう。1907帰国し、東京弁護士して弁護士となる。1913年合同法律事務所けとなる東京法律事務所設立1916年平民法律所開設1917年平民大学創立学令づくではない。)。弁護士団体である自由法曹1921)の結成参加。また、日本社会党1913山崎1人政党)、日本社会主義同盟1920)、日本フェビアン1924)の設立わるなど会主義者としても活動し、会主義者弁護数手がけた。戦後三鷹事件松川事件弁護にもわった。「国伯爵」をしたり、「弁護士大安」という広告すなど奇行・奇文としてられ、著書雑誌刊行した

[4] 도쿄 유학생 사회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에서 갈라진 공산주의파 김약수(金若水) ·김종범(金鍾範) ·송봉우(宋奉瑀변희용(卞熙鎔) ·이여성(李如星) 등이 중심이 되어 1923년에 조직한 사회주의 단체다. 주요 강령은 한국과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결합, 재일조선인노동자의 단일조합 창설이며, 기관지 《척후대(斥候隊)》《대중시보(大衆時報)》 《전진(前進)》을 발행해 민족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였다. 북성회 주류파는 국내에 신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귀국,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던 중 서울청년회와 마찰을 빚어 낙양관사건(洛陽館事件)을 촉발하기도 하였고, 한국과 일본 노동운동의 결합을 꾀하는 한편, 노동운동 지도자 육성에도 힘썼다. 1923 11월에는 여러 민족단체와 협의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국내에서는 김찬(金燦) ·권오설(權五卨) ·안기성(安基成) ·홍명희(洪命熹) ·박헌영(朴憲永) 등이 중심이 되어 화요회(火曜會)를 조직, 뒤에 제1차 조선공산당과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한다.김약수 ·송봉우(宋奉瑀) ·김종범 등은 조선 내에서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해 민족해방을 위한 민족협동전선 조직을 추구, 뒤에 제3차 조선공산당조직에서 주도권을 잡는 기틀을 마련하였고, 일본에 남아 있던 북성회 회원들은 대중 위주의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조직을 정비, 북성회를 해산하고 일월회(一月會)를 조직하는 등 한국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26년 북성회 계통의 여러 단체는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 등과 합작, 정우회(正友會)로 통합되었다.

[5] 동아일보 1923 8 3일자 신문 <表面開發其實 朝鮮民族幸福은 아니라는 것을 늣겼소 입경한 布施辰治氏談>

[6] 1919 3·1운동 이후, 1921년까지 급진적이고 점진적인 민족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1922~1923년은 민족주의운동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분리되면서 분파가 발생한 시기였다. 1924~1925년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 정비를 시도하던 시기였다.이 시기에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국내에 사회주의사상·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었고 1922 2월 동우회선언(同友會宣言)을 전후로 사회주의 경향의 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무산자동맹회, 북풍회(北風會), 화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주요 좌익사상 단체였다.1923 6월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高麗局]에서 밀명을 받고 잠입한 김재봉(金在鳳)과 김약수(金若水유진희(兪鎭熙) 등이 포함된 17명의 화요회를 모체로 하여 서울에서 코르뷰로 국내부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1924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임명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박헌영(朴憲永)이 임명되었다. 화요회가 모체라서 '화요파의 당'이라고도 불렀다. 이때부터 국내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들어갔고, 조선공산당을 11당 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하였다. 그러다 1925 11월 김재봉과 박헌영이 조직 확대를 목적으로 청년회원을 모스크바에 파견하는 훈련을 진행하다 일제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무너졌다. 이것을 제1차 공산당사건이라 한다. 그러나 당시 체포되지 않고 숨어 있던 당 책임비서 김재봉이 당원 강달영(姜達永)과 함께 1926 6월 서울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당 책임비서에 강달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선출되었다. 이들의 정치목표는 민족진영과 연합하여 국민적 당을 만들어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을 통해 3·1운동을 재현하려던 계획이 들통나 대부분의 당원이 체포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 이것이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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