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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부활과 죽음에 대하여

 

Canon EOS 5D | 1/800sec | F/2.8 | 43.0mm | ISO-400

 

생명체는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떠한 생물도 죽음에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죽음 앞에서는 강한 생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박테리아도 평등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평등하게 주어진 것은 삶의 시작과 삶의 끝인 죽음이 아닐까?

 이 죽음 앞에서 모든 생명체는 자유로울 수 없는데, 2000여년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많은 이적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과 그 후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이야기 했다. 그 후 예수는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3일후 부활하여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나타났고, 사람들 사이에 예수의 부활이 기록되었다. 과연 예수의 부활은 진짜인가? 아니면 신화일까? 그것이 전승되면서 믿음이 되고, 신앙이 되었을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부활이란 것은 죽음과도 연결 되어 있지만, 구원과도 연결 되어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구원과 부활은 거의 동일시 되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환자들 중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죽음에 두려워하는 것 반해, 무신론자(無神論者)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는 죽음 앞에서 태연하다는 것이다.(-『신이 없는 사회』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마음산책·16000) 그렇다면 이들의 믿음이 잘못인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 이들을 두렵게 한 것일까?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죽음을 이긴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긴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목회자(또는 신학자)는 우리에게 부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과연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비()기독교인들의 삶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 것인가? 그저 비()그리스도인보다 좀더 기부를 많이 하고, 좀더 착하게 살아가며, 좀더 욕심을 덜 부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살아가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입으로 고백하고, 매주 교회나 성당에 가서 예배(또는 미사)를 드리며, 교회 내에서 활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지만,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로 고백하지 않고, 교회 활동이나 예배를 참석하지 않고, 그저 일반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좀더 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삶인가?

 

먼저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입대를 앞둔 건장한 청년이 막연히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예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죽음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간접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저 현재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는 지인과 친척가족들을 볼 수 없고, 이야기 할 수 없으며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죽음을 두렵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DSLR-A200 | 1/640sec | F/9.0 | 300.0mm | ISO-200

 

 죽음을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과정 중에 하나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창세기 4: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라고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두렵고 어렵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 있는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심판이 이승의 삶을 기준으로 이승의 삶의 결과론적인 심판이기에 두려운 것이 아닐까? , 이승의 삶에서 하느님을 따르던 삶이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믿음이 죽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닐까? 최후의 심판은 있지만, 그 심판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재판처럼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일까? 우리는 그 심판에 대해 모른다. 다만 비유적인 언어로 세상의 재판처럼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부활을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체득(體得)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로 마음의 끌림에서 체득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의문과 답을 찾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평생이 될 수도 있고,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새롭게 다시 살아난다는 것과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일어선다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들은 부활을 설교할 때에 육체의 부활을 설교하였다. 지금도 그렇게 믿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나 부활은 그런 부활을 우리가 믿는다면, 조금은 유치하지 않는가? 예수의 부활은 전혀 새로운 부활이다.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가복음 24:13-35) 또한 열한제자에게 나타났을 때 그가 예수인지 믿지 못하였다.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이다.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복음 20:28)이라고 고백하였다. 우리가 믿는 부활은 현재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라, 전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부활인 것이다. 그 부활을 믿으며, 그 부활을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고, 더 나아가 언젠가 있을 죽음에 대하여 두렵지 않고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일어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넘어지게 한 것으로부터 다시 일어선다는 의미이다. 삶에서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많다. 쉽게는 육체적인 넘어짐이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영혼의 넘어짐이 있을 것이다.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육체적인 넘어짐에서 일어선다는 것보다는 영혼의 넘어짐에서 일어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실 육체적인 넘어짐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넘어짐은 쉽게 일어날 수도 없으며, 한번 넘어진 영혼은 비슷한 상황에서 더 쉽게 넘어진다.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영혼의 넘어짐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굳건하게 그 상황을 이겨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일어난 영혼은 그 비슷한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그 역경을 이겨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그러한 역경을 이겨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상황에서 인간적인 지식이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통해서 그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그 지혜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인간적인 지식으로도 이 삶의 역경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삶의 역경을 벗어나는 속도가 많이 느릴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없이 그 상황을 벗어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또한 영혼의 아픔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겉모습은 괜찮아도. 영혼이 아픈 사람은 많다. 그러나 영혼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을 스스로 아무리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때론 영혼의 아픔을 보듬어주기는 한계가 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픈 영혼의 넘어진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 종교를 찾게 되고, 절대자의 힘을 찾게 된다. 예수의 부활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의미는 인간적인 한계 및 영혼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 한계를 이겨내게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경동교회 여해강좌 시간에 들었던 특강을 토대로 개인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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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 부활절 쯤에...




부활절 쯤에... 법정스님의 글... 내가 좋아하는 분 중에 한명... 


다큐 "법정스님의 의자"를 보면.. 가슴에 울림이 왔던...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들은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파격적인 세족식을 보며...


조금은 깊은 생각을 부활절쯤에 하게 한다... 잘 모르겠지만...


이런 종교인들의 글이 내게 요즘.. 울림이 되어준다.. 


*답방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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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가 임신 양성반응??

*http://media.daum.net/foreign/topic/view.html?cateid=1075&newsid=20111215112213318&p=akn 



14(현지시간) 현지 일간 뉴질랜드 헤럴드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를 등장시킨 광고는 13일 저녁 오클랜드의 세인트 매튜 성공회 성당 앞에 세워진 것으로 '감상적이고 진부한 것을 피하고 상상력을 자극해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한마디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한 광고다.

광고가 재미 있지만, 한편으로는 토론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수 있는 논제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에게 성탄절은 어떤의미로 다가오는지,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소위 기독교인 또는크리스찬들은 이 광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성당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
실제 임신, 실제 어머니, 실제 아기에 관한 것이자 현실 속의 불안·용기·희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신의 메시지에도 미혼의 젊고 가난했던 여성 마리아가 임신 사실을 확인했을 때 무척 충격적이었을 것"이라며 "임신은 마리아의 미래를 바꿔놓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 처한 여성이 마리아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크리스마스란 즐거운 날이어야 한다. 그러나 돈 없는 사람,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 등 많은 이가 고통 받고 있다. 최초의 산타였던 성(聖) 니콜라우스가 그랬듯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고 이들과 서로 나누며 이들을 보살피는 날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교회에서 이런 광고가 보기 힘들다는 것은 어쩌면 한국교회의 신앙정도가 아직 미성숙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교회와 많은 신도수를 거느리고 있지만, 어쩌면 이 사회보다 더 어두운 공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이땅의 교회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왜 성공회로 옮겼는지... 성공회 감사성찬례(미사)가 행위의 일종이며, 그것으로 만족함을 얻을 수 없다고하면서 다시 장로교회로 돌아올것을 권유한다. 그렇다면 다시 그들에게 묻고 싶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기뻐하며 예배드리는 적이 얼마나 있는지 묻고 싶다. 그 예배가 열린예배든 전통적인 개신교예배 형식이든 간에 그 예배 속에서 얼마나 평안을 느끼며, 웃음을 맛보면서 열정적으로 들으면 설교속에서 하늘에 계신 그분의 평안함을 누렸고, 소통했는지 묻고 싶다. 사회에서 화두는 소통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일종의 소통의 부재였다고 생각한다. 난 그런 소통을 소위 주류 교회에서 느끼지 못했다. 일종의 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예배 또는 미사라는 시공간에서 평안을 느끼고 진정으로 그분의 말씀이 일종의 형식이 아니라 짐이 아니라 마음에 평안으로 들리는 음성이라면 그것이 어찌 행위인가...주류가 무조건 옳다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신과 하느님이 소통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예배가 있다면 그곳이 내가 있어야할 성소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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